몸이 없는 입

번역가가 주인공인 소설 《글자를 옮기는 사람》 (다와다 요코 지음, 유라주 옮김, 워크룸프레스, 2021)은 언뜻 번역과 무관해 보이는 장면들로 점철되어 있다. 주인공은 마감이 임박한 프로젝트에 집중하고자 어느 섬으로 홀로 떠나는데, 책상머리에 붙어 앉아 텍스트와 씨름하기보다 예상치 못한 몸의 변화에 대처하는 데 많은 시간을 보낸다. 복숭아 알레르기로 잔뜩 부어오른 입술을 떼어버리고 싶은 충동에 시달리거나, 몸의 피부가 온통 점막이 된 것만 같은 기분에 빠져드는 식이다. 주인공은 창밖에서 흔들리는 야자수 잎을 바라보며 말한다. “나는 딱히 뾰족한 걸 무서워하지는 않았지만 내 눈꺼풀이나 입안 점막이 필요 이상으로 부드럽게 느껴질 때가 있었다. 그러면 몸의 다른 부분도 점막인 듯한 착각에 사로잡혀 아무리 죄 없는 나뭇잎 끄트머리라도 가까이에 있으면 왠지 불안해진다.”[1] 번역가로서 언어와 언어 사이에서 투명한 유리처럼 존재하기를 기대받는 일이 잦기에, 이 묘사를 읽으며 무척 반가웠다. 얇고 투명하기는커녕 물렁하고 끈적한 살덩이. 놀랍게도 번역가에게는 몸이 있고, 새로운 언어(작품)을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이전에는 당연히 여겨 감지하지 못했던 것들이 때로는 오돌토돌하게, 때로는 뾰족하게 감각된다. 이때 나를 ‘나’로 존재하게 하는 기본 단위, 몸에서부터 변화가 일어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 주인공은 심지어 번역 그 자체가 ‘변신’일지 모른다고 생각한다. “단어가 변신하고 이야기가 변신해서 새로운 모습으로 바뀐다. 그리고 마치 처음부터 그런 모습인 양 아무렇지 않은 얼굴을 하고 늘어선다. 이렇게 하지 못하는 나는 분명히 서투른 번역가다. 나는 말보다 내가 먼저 변신할까 봐 몹시 무서울 때가 있다.”[2] 주인공은 “단어 하나하나의 낯선 감촉에 충실”해서 “단어 하나를 읽는 데도 숨이 차”는 사람이다.[3] 능청스럽고 매끈한 번역을 내놓지 못해 ‘서툴다’는 평을 받는 그가 글자를 옮기는 일은 몸이 일그러지고 진물을 흘리는 장면들과 자꾸만 포개어진다.

그렇지만 독일어와 일본어, 두 언어로 작품을 만드는 작가 다와다 요코처럼 언어를 오가는 이들의 몸에 관심을 기울이는 사람들은 많지 않다. 앞서 말했듯 번역가는 원문을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자연스럽게’ 옮겨 눈에 띄지 않기를 요구받거나, 전적으로 지적인 역량이라 간주되는 언어능력으로 주목받는다. 번역가로서 그동안 받아온 몇몇 의뢰를 떠올려 보면, 그 당시 의뢰인은 번역가를 영어식으로 표현하면 ‘유리병 속의 뇌’(brain in a jar), 한국어식으로 말하자면 ‘자판기’ 정도로 상상한 게 아니었을까 싶다. 그러나 번역가에게는 몸이 있어서, 하루 종일 일만 하는 게 아니라 밥을 먹고 바람을 쐬고 멍하니 앉아 있기도 한다. 그 몸은 장애인, 유색인종, 비-남성, 성소수자로 분류되거나, 피식민지에서 자랐다는 이유로 기회에서 미끄러질 때가 있다. 어떤 몸에서부터 나오는 언어는 어딘가 어색하거나 전문성이 부족하다는 평가를 받는 것이다. 2017년 미국 작가협회에서 회원 중 번역가를 대상으로 진행한 설문에 의하면, 응답자 205명 중 83 퍼센트가 백인이었다.[4] 2022년 부커상 최종 후보에 오른 정보라 작가의 소설집 《저주토끼》를 번역한 안톤 허 번역가는 《The Mythical English Reader (가상의 영어 독자) 》라는 에세이에서 수년간 여러 편집자로부터 “영어 독자는 이런 문장을 어색하다고 느낄 겁니다”또는 “영어 독자가 이해하기 쉽게 바꿔주세요” 같은 피드백을 받아왔다고 썼다.[5] 평생 영어로 글을 읽어왔고, 대다수의 영어 구사자보다 더 ‘표준’에 가깝고 유려한 영어를 구사하는데도 말이다.

그렇다면, AI 번역기야말로 마음은 급하고 예산은 적은 의뢰인들이 원하던 번역가가 아닐까? 사람처럼 때와 장소가 갖춰져야 일하지도 않고, 빅데이터를 바탕으로 나온 결과물이라면 ‘가상의 영어 독자’의 취향에도 가까울지 모른다. 얼마 전에는 GPT-3를 “뇌가 없는 입”이라 묘사하는 기사를 읽고,[6] AI 번역기는 ‘몸이 없는 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뇌가 없는 입’이라는 표현은 기계를 훈련시키는 데 사용되는 데이터에 인간이 만들어 낸 온갖 차별성 발언과 허위 정보가 포함되며, 아직까지는 AI가 사실과 거짓을 구분하지 못한 상태로 텍스트를 생성한다는 점을 지적한 것이지만, AI 번역기에게 몸이 없다는 것은 인간의 기억력을 비롯한 제한으로부터 자유롭다는 의미일 수 있다. 최근 주목받고 있는 DeepL의 등장 전부터도 번역업계에서는 기계번역을 활용해 왔으며, 기계가 작성한 초벌 번역문을 사람이 고쳐 완성하는 형태의 의뢰를 받아 일하는 번역가들도 많다. 나 또한 최근 DeepL을 사용해 보면서 이전보다 기술이 발달했다는 것을 실감했고, 앞으로 생산성 증대와 비용 절감을 목적으로 기계번역이 더 폭넓게 활용될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소비자의 입장에서, 좋은 품질의 번역을 저렴한 가격으로 빠르게 접할 수 있다면 무엇이 나쁘겠는가?

물론 현재 AI 번역기의 작업물 품질을 고려했을 때, 맥락에 대한 이해가 부족해 발생하는 오역과 직역은 개선해야 할 부분이다. 예를 들어 앞서 언급한 에세이 《The Mythical English Reader》를 DeepL은 ‘신화적 영어 독자’로 번역했다. 이 정도 오역은 한영 번역에 대한 데이터가 서양 언어간 번역 데이터에 비해 적어서 발생하는 문제일 수도 있겠다. 더 까다로운 경우는 원문을 단어 하나씩 그에 상응하는 단어로 옮기기보다, 문장 전체나 작품 전반의 의도를 파악해 의역을 하는 것이 나을 때이다. 예를 들어, 나는 한정현 작가의 단편소설 <우리의 소원은 과학 소년>을 번역하면서 작품 속에서 여러 번 등장하는 문장, “낙관하자”를 어떻게 번역할지 고심했다. 직역하면 “Let’s be optimistic”이겠으나, 일제강점기 조선에서 성별이분법에서 벗어나 자기 자신으로 살아가고자 하는 주인공들이 서로를 위해 되뇌는 이 문장을 원문에서처럼 간결하고 담담하게 표현하고 싶었다. 결국 내가 선택한 것은 “Chin up”이라는 표현이었다. 어쩌면 이 정도 의역은 AI에 “Let’s be optimistic”이라는 의미의 다른 표현을 찾아달라고 요청해 찾아낼 수도 있다. 실제로 ChatGPT에 이 질문을 했더니 “Keep your chin up”이 선택지 중 하나로 제시되었다. 이렇게 AI를 도구로 활용하려면, 우선 어떤 경우에 의역이 필요한지 판단하고, 적합한 질문을 만들고, 주어진 선택지 중 작품의 맥락에 적합한 것이 무엇인지 정할 수 있을 정도로 출발어와 도착어, 그리고 작품에 대한 이해를 갖추고 있어야 한다.

더 나아가, 나는 때때로 의역을 통해 도착어 특유의 표현들로 작가의 의도를 전달하고, 문장 구조를 도착어에 알맞게 바꾸기도 한다. 최근 번역한 정지돈 작가의 장편소설 <…스크롤!>은 팬데믹 이후의 가까운 미래를 그리는데, 두 인물이 버려진 요트에서 캔-D라 불리는 마약을 정제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아래 두 문장을 DeepL과 내가 어떻게 번역했는지 비교하는 것을 통해 ‘정보를 전달하는 번역’과 ‘의도를 전하는 번역’의 차이를 짚어보고 싶다.

<…스크롤!> 중에서:

캔-D는 코카인과 실로시빈, 세르그산, DMT, MDMA 따위를 정제, 합성해 만든 것으로 부작용은 적고 효과는 세 배인 꿈의 약물이었다. 정품은 비싸서 살 수 없지만 다들 야매로 만들어 주사했다.[7]

DeepL의 번역문:

Can-D is a refined and synthesized combination of cocaine, psilocybin, sergic acid, DMT, and MDMA, and it was a dream drug with fewer side effects and three times the effectiveness. You can’t buy the real thing because it’s expensive but everyone made and injected it.

(Can-D는 코카인, 실로시빈, 세르그산, DMT, MDMA를 정제하고 합성한 것으로 부작용은 적고 효과는 3배나 높은 꿈의 마약이었다. 가격이 비싸서 진짜는 살 수 없지만 누구나 만들어서 주사했다.)

나의 번역문:

Can-D was a synthesis of distilled cocaine, psilocybin, lysergic acid, DMT, and MDMA; side effects were minimal but the intended effects triple. A dreamboat of a drug, you could say. The official thing was too expensive, but everyone made it on the down-low and shot up.[8]

(Can-D는 정제한 코카인, 실로시빈, 세르그산, DMT, MDMA를 합성한 것으로, 부작용은 미미했지만 의도된 효과는 세 배였다. 말하자면 꿈의 마약. 정품은 너무 비쌌지만, 다들 야매로 만들어 주사했다.)

먼저 돋움 처리한 단어를 살펴보면, DeepL은 “꿈의 약물”을 직역해 “dream drug”라고 번역했고, 나는 “dreamboat”라는 단어를 썼다. “Dreamboat”는 ‘(꿈에 그려온) 매력적인 사람’을 지칭하는 표현인데, 이 장면이 요트 위에서 펼쳐지고 있기에 ‘배’가 들어가는 이 표현을 쓰면 재미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두 번째로 돋움 표시한 “야매로 만들어 주사했다”를 DeepL은 “made and injected”라고 번역했는데, ‘야매’라는 단어가 누락되었다. 이 표현을 나는 “made it on the down-low and shot up”이라고 번역했다. “Down-low”는 ‘몰래, 숨어서’라는 뜻이고, “shot up”은 마약을 주사하는 행위를 가리키는 은어다.  나에게는 Down과 up의 대조가 재미있었고, ‘야매’라는 단어를 쓰는 인물의 말투를 영어로도 재현해 생동감을 주고자 했다. 그 외에도 나의 번역문은 원문의 문장 구조에서 벗어나 총 세 문장으로 이루어져 있고, 한글 텍스트에서는 쓰이지 않는 문장부호인 세미콜론을 활용해 원문과 다른 리듬으로 읽힌다.

게다가, 번역가는 의도적으로 껄끄러운 번역을 할 때도 있다. 출발어의 관습이나 소리를 도착어라는 무대에도 등장시키는 것이다. 아티스트 이랑의 노래 <빵을 먹었어> 가사를 번역하면서 이런 방식을 택했는데, 이 노래는 이렇게 시작한다.

빵을 먹었어

빵을 먹고 빵을 남겼어

남긴 빵을 그려보았어

그린 빵을 보고 앉아서

이것 밖에 없었어

오늘 본 것 중에 가장 좋은 것이

좋다고 말할 만한 것이

이 노래의 영문 제목은 “Pang”이고, 가사 본문에서 반복되는 “빵”도 모두 “Pang”으로 번역했다. 출퇴근길 지하철에서, 자전거 위에서, 싱크대 앞에서 노래를 수십 번 들으면서, 나는 이 노래 속 ‘빵’을 더 이상 ‘밀가루로 만들어진 먹을거리’로 상상하지 않게 되었다. 삶의 의미와 무의미, 반복되는 고통에 무감해진 얼굴이 떠올랐다. 그래서 작가와 질문을 주고받는 번역 문서에 이렇게 코멘트를 남겼다. “이 노래를 들으면 들을수록 ‘빵’이 ‘bread’라는 의미도 있지만 어떤 소리로서 기능하는 것 같아요. 그래서 영번역에서 의미를 알려주기보다 ‘pang’ 이라고 씀으로써 듣는 사람이 상상하도록 유도하는 게 어떨까 합니다.” 영어에는 ‘pang’이라는 단어가 이미 존재하기는 하지만, <빵을 먹었어> 덕분에 내가 ‘pang’ 이라는 단어를 새로 배운 것처럼 이 노래를 듣는 사람들에게도 새로운 언어를 건네고 싶었다.

I ate some pang

I ate some pang and had some left over

I drew the leftover pang

Sat there looking at the drawing

It was the only thing

The best thing I’d seen all day

The only thing I could say was good

*

“전달하는 기능을 수행하려는 번역은 정보 즉, 비본질적인 것 외에는 아무것도 전달할 수 없다. 그러나 문학 작품의 본질은 그것이 담고 있는 정보 이외의 것 […] 헤아릴 수 없고, 신비롭고, ‘시적인 것’, 번역가 또한 시인이어야만 재현할 수 있는 것에 있지 않은가?”[9] 철학자 발터 벤야민이 남긴 이 말을 종종 꺼내본다. 나를 번역으로 이끄는 작품은 나에게 시인이 되라 요구하는 작품이다. 그 작품에 너무나 매료되어서, 그 작품이 나에게 준 경험을 다른 이들도 자신의 몸으로 겪어보기를 바라기에 책상머리에 붙어앉아 몇 시간이고 허리와 눈과 어깨를 내어주곤 한다. 그렇게 한 작품을 이해하려 시도한 결과가 나에게는 번역문이다.

투덜대면서 하긴 하지만, 결국 번역이라는 변신 과정으로 매번 나 스스로 기어들어간다는 걸 부인할 수 없다. 번역기라는 몸 없는 입이 생기기 전부터도 몸을 바꾸지 않은 채 언어를 바꾸는 방법은 허다했으니 말이다. 그에 비해, 몸 전체가 점막이 된 것 같은 기분. 빵을 보면 떠오르는 메마른 얼굴. 확실히, 이런 경험을 누구나 즐겁거나 의미 있다고 느끼지는 않을 것이다.  앞으로는 더더욱 집요한 별종들이나 찾아나서게 될 것 같다.


[1] 다와다 요코, <글자를 옮기는 사람>, 31쪽.

[2] 다와다 요코, 같은 책, 23쪽.

[3] 다와다 요코, 같은 책, 23쪽.

[4] Gitanjali Patel & Nariman Youssef, “All the Violence It May Carry on Its Back*: a Conversation about Literary Translation”, Violent Phenomena, ed. Kavita Bhanot & Jeremy Tiang, Tilted Axis Press, 2022.

[5] Anton Hur, “The Mythical English Reader,” 같은 책.

[6] 컴퓨터공학자 최예진 교수가 쓴 표현으로 Lauren M.E. Goodlad & Samuel Baker의 에세이 《Now the Humanities can Disrupt ‘AI’ 》에서 인용되었다.

[7] 정지돈, <…스크롤!>, 민음사, 2021, 9쪽.

[8] 더 긴 번역문은 웹진 <Asymptote>에서 읽어볼 수 있다.

[9] Walter Benjamin, “The Task of the Translator: an Introduction to the Translation of Baudelaire’s Tableaux Parisiens”, tr. Harry Zohn, The Translation Studies Reader, ed. Lawrence Venuti, Routledge, 2000, p.75. 인용문 영한 번역: 문호영.

  • 이 글은 포스텍 융합문명연구원에서 운영한 ‘웹진 X’에 최초로 공개되었으나, 현재 웹사이트가 폐쇄되어 이곳으로 옮겼다.